장비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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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비는 삼국 시대 촉나라의 무장으로, 유비, 관우와 의형제를 맺고 유비를 섬겼다. 탁군 출신으로, 용맹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장판파 전투에서 20명의 기병을 이끌고 조조군을 막아 유비를 탈출시키는 데 기여했다. 익주 평정, 한중 공방전 등에서 활약했으며, 우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의 죽음에 복수하려다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후세에는 용맹한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백정 출신으로 묘사되어, 장팔사모를 주무기로 사용하며, 술을 좋아하고 호탕한 성격의 인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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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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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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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비 |
로마자 표기 | Jang Bi |
본관 | 탁군 |
시호 | 환후 (桓侯) |
자 | 익덕 (益德) |
작위 | 서향후 (西鄕侯) |
관직 정보 | |
최종 관직 | 거기장군 (車騎將軍), 사례교위 (司隸校尉) |
임관 시기 | 221년 |
섬긴 군주 | 유비 |
주요 경력 | 별부사마 중랑장 정로장군 겸 의도태수 남군태수 파서태수 우장군 거기장군 겸 사례교위 |
생애 | |
출생 | 불명 |
출생지 | 후한 탁군 |
사망일 | 221년 6월 (음력) |
사망지 | 촉한 파서군 낭중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하후씨 |
자녀 | 장황후 (유선의 첫 번째 황후) 장황후 (유선의 두 번째 황후) 장포 장소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유비 (주군) 손권 (적) 범강 (피살자) 장달 (피살자) 유선 (사위) |
2. 생애
장비는 어릴 적부터 유비를 섬겼으며, 황건적의 난 때 유비가 의용병을 모으자 관우와 함께 참여했다.[56]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함께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었고, 셋은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4] 장비와 관우는 유비의 호위 무사 역할을 하며 어떤 위험에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5]
194년, 유비는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 자사가 되었고, 196년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동안 장비는 하비를 지켰으나, 조표와의 불화로 여포에게 패하고 유비의 처자식은 사로잡혔다.[57] 이후 유비와 함께 조조의 여포 토벌에 종군하여 중랑장에 임명되었다.[8]
199년, 유비는 조조를 배신하고 서주를 장악했으나, 이듬해 조조에게 패하여 원소에게 의탁했다. 200년에는 땔감을 구하러 나온 하후연의 어린 조카딸을 아내로 삼았다.[58] (다만 위략의 기록은 신빙성이 낮아, 정략 결혼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208년,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자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장비는 장판에서 20기의 기병으로 다리를 끊고 조조군을 막아섰다.[84] 적벽 대전 이후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의도 태수 겸 정로장군에 임명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해졌다.
212년, 유비가 유장과 전쟁을 벌이자 제갈량, 조운과 함께 형주로부터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각 군현을 점령했다. 파군태수 엄안을 사로잡아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장비는 엄안의 강직함에 감탄하여 풀어주고 빈객으로 삼았다.[85] 이후 성도에서 유비와 합쳤고, 금 500근, 은 1000근, , 비단 1,000필을 상으로 받고 파서태수(巴西―)를 겸하였다.
215년, 장합이 파서군으로 내려오자 탕거현(宕渠縣)에서 50여 일 동안 대치한 끝에 정예병 1만여 명으로 와구(瓦口)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217년 마초, 오란, 뇌동과 하변(下辯)에 주둔하며 조홍과 대치했다. 218년 유비가 직접 한중으로 나아가자, 장비는 오란과 따로 기동하며 조홍군의 뒤를 끊는 척했으나, 조홍이 조휴의 진언으로 이를 간파하고 오란을 격파하자 장비는 양평관(陽平關)으로 물러났다.[87]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장비는 우장군 가절(假節)을 받았다.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장비는 거기장군 겸 사례교위가 되고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관우가 죽은 후, 유비가 오나라 정벌(이릉 대전)에 나서자 장비는 낭중(閬中)에서 군사를 이끌고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32] 그러나 평소 부하들에게 폭력적이었던 장비는 범강, 장달에게 암살당했다.[33]
260년, 유선은 장비에게 환후(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다.[35][36][66] 유비는 장비의 부관이 보낸 보고를 듣고 "아! (장)비가 죽었구나."라고 외쳤다고 한다.[34]
2. 1. 초기 생애와 유비와의 만남
탁군 출신인 장비는 어릴 때부터 유비를 섬겼다. 유비는 장비의 자(字)인 익덕(益德)을 지어준 사람이다. 당시 관례에 따르면 자를 지어준 사람에게는 친아버지처럼 대우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장비는 평생 유비 한 사람만을 섬겼다. 관우는 이 이후에 만난 사이로, 장비는 간옹과 함께 유비를 가장 먼저 섬긴 사람들 중 하나이다.[80]장비는 황건적의 난 당시 유비가 의용병을 모을 때 관우와 함께 참여하여 유비의 부하가 되었다.[56] 이후 관우와 함께 유비로부터 형제와 같은 친애의 정을 받았으며, 유비를 주군으로 받들고 목숨을 걸고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관우가 몇 살 더 많았기 때문에 관우를 형처럼 존경하며 섬겼다.[2][56]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장비와 관우는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었다. 유비는 그들을 친형제처럼 아꼈고, 셋은 같은 방을 쓰고 같은 자리에 누우며 같은 솥에서 밥을 먹는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4] 장비와 관우는 유비의 호위 무사 역할을 하며 어떤 위험과 어려움에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5]
2. 2. 서주에서의 활약과 좌절
유비가 평원상일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를 했다.[80] 196년(건안 원년) 서주목 유비가 원술을 치러가면서 도겸의 옛 부하이자 하비상인 조표와 같이 하비를 지켰으나, 서로 다투어 조표가 여포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유비의 처자식을 남겨둔 채 패주했다.[81]194년, 유비는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 자사가 되었다. 다음 해, 군대를 이끌고 회음현으로 가서 원술의 침략에 맞섰다. 이 기간 동안 장비를 하비에 남겨 서주의 수도를 지키게 했다.[6]
장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도겸 휘하의 옛 장수였던 조표를 죽이려 했다. 조표는 자신의 진영으로 도망가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당시 유비에게 의탁하고 있던 또 다른 군벌인 여포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여포는 군대를 이끌고 하비를 공격하여 하비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장비는 하비를 여포에게 빼앗긴 후 도망쳤다.[7]
흥평 원년 (194년), 유비는 서주에서 서주 목인 도겸에게 자리를 양보받아 서주목이 되었다.[54]。건안 원년 (196년), 유비가 서주를 침공한 원술과 싸우는 동안 장비는 본거지인 하비의 유수를 맡고 있었으나, 그곳에서 하비상 조표와 대립했다.[57]。유비와 원술이 한 달 동안 대치하는 사이에 유비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여포가 하비를 공격했다.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에게 호응했기 때문에 장비는 패배하여 유비의 처자를 포로로 잡혔다.
198년 여포가 토벌된 후 조조가 중랑장을 주었다.[8] 유비는 여포의 지배하에 놓인 서주로 돌아왔고, 여포가 하비에 머무는 동안 소패로 이동하라는 여포의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유비와 여포 사이의 긴장은 갈등의 수준까지 고조되었다. 유비는 한나라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군벌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조조와 유비는 연합하여 198년 하비 전투에서 여포를 격파한 후, 함께 황도 허창으로 돌아갔다. 허창에서 장비는 중랑장(中郎將중국어)으로 임명되었다.[8]
199년 유비는 동승과 조조 주살을 모의하다가 서주로 출정하여 거병하였다. 이때 장비가 진의록에게 ‘귀공의 전처를 조조가 취하지 않았냐’며 동참을 권하였다. 이에 따라오던 진의록이 이내 후회하여 돌아가려고 하자 죽였다.[82]
2. 3. 유비의 고난을 함께하다
유비가 평원상일 때 관우와 함께 별부사마(別部司馬)를 했다.[80] 유비가 황건적의 난 진압을 위해 의용병을 모을 때부터 함께했으며, 관우와 함께 유비의 호위를 맡았다.[56]194년(흥평 원년), 유비는 서주목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목이 되었다.[54] 196년(건안 원년), 유비가 원술과 대치하는 동안 장비는 하비를 지켰으나, 하비상 조표와의 불화로 인해 여포에게 패하고 유비의 처자식은 사로잡혔다.[57] 이후 유비와 함께 조조의 여포 토벌에 종군하여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199년, 유비는 조조를 배신하고 서주를 장악했으나, 이듬해 조조에게 패하여 원소에게 의탁했다. 장비가 유비를 따라 원소에게 갔는지는 불분명하다.[9] 200년에는 땔감을 구하러 나온 하후연의 어린 조카딸을 아내로 삼았다.[58] 그러나 위략의 기록은 신빙성이 낮고, 당시 장비는 유비와 함께 서주와 하북으로 도주하던 시기라 하후씨가 납치되었다는 고향(예주 초현)에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며, 조조의 친인척이 땔감을 모으는 잡일을 하는 등의 기록 자체는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여 날조되었거나 정략 결혼을 왜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208년,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자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장비는 장판에서 20기의 기병으로 다리를 끊고 조조군을 막아섰다.[84] 적벽 대전 이후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의도 태수 겸 정로장군에 임명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해졌다.
2. 4. 장판파의 영웅
208년[84] 조조가 형주로 군을 움직이면서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빠르게 추격해온 조조군을 당양의 장판(長阪)에서 20기만을 거느린 채 다리를 끊어 막았다. 눈을 부릅뜨고 모를 가로로 들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니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59] 이로 인해 유비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60]
2. 5. 익주 평정과 한중 공방전
212년 유비가 유장과 전쟁을 벌이자 제갈량, 조운과 함께 형주로부터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각 군현을 점령했다. 강주(江州)에서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다. 장비가 항복하지 않은 엄안을 꾸짖자, 엄안은 ‘유비군이 무도하게 익주를 침탈했으니 머리가 잘릴지언정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고 답했다. 장비는 노하여 참수를 명했으나, 엄안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 화를 내는가!”라고 하자 장하게 여겨 풀어주고 빈객으로 삼았다.[85] 이후 장비는 덕양(德陽)에서 장예를 물리치는 등[85] 가는 곳마다 이기고 성도에서 유비와 합쳤다. 제갈량, 법정, 관우와 더불어 금 500근, 은 1,000근, 5,000만 전(錢), 비단 1,000필을 상으로 받고 파서태수(巴西―)를 겸하였다.215년 조조가 장로의 한중을 손에 넣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둔 채 돌아갔다. 장합이 파서군으로 내려와 그 주민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기에 탕거현(宕渠縣)에서 서로 겨루었다. 50여 일을 대치한 끝에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와구(瓦口)를 공격하였다.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장합은 부하 10여 명과 같이 말을 버리고 산을 타 퇴각한 후 패잔병을 수습하여 남정(南鄭)으로 돌아갔다.
217년 마초, 오란, 뇌동과 하변(下辯)에 주둔하니 조홍이 맞서 왔다. 218년 유비가 직접 한중으로 나아갔다. 3월(음력) 장비는 오란과 따로 기동하며 조홍군의 뒤를 끊는 척 시위하였다. 조홍이 조휴의 진언으로 이것이 허장성세임을 간파하고 바로 오란을 습격하여 격파하자[86] 장비는 유비의 본진이 있는 양평관(陽平關)으로 물러났다.[87]
2. 6. 관우의 죽음과 비극적 최후
219년(건안 24년), 유비가 한중을 정복하고 한중왕에 오르자 장비는 우장군 가절(假節)을 받았다. 221년(장무 원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장비는 거기장군 겸 사례교위가 되고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관우가 죽은 후, 유비가 오나라 정벌(이릉 대전)에 나서자 장비는 낭중(閬中)에서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32] 그러나 평소 폭력적인 성격으로 부하들에게 원한을 산 장비는 범강, 장달에게 암살당했다.[33]260년(경요 3년), 유선은 장비에게 환후(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다.[35][36][66] 유비는 장비의 부관이 보낸 보고를 듣고 "아! (장)비가 죽었구나."라고 외쳤다고 한다.[34] 후사는 차남 장소가 이었다.
3. 성품과 평가
유비, 관우와 우애가 끈끈했다. 황건적의 난 때 유비가 탁군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한 방에서 같이 잤고 그 정은 형제 같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 서서 윗사람처럼 모셨으며 고난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어디든 따라다녔다.[80] 나날이 친밀해지는 제갈량과 유비 사이를 관우와 같이 질투하기도 하였다.[89]
군자는 경애했던 데 반해 소인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유비는 이를 염려하여 언제나 주의를 주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이로 인해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직후 조칙에서는 장비를 고대의 소호에 비유하여 그 무용을 칭찬했다. 정욱 등은 "장비의 용맹함은 관우에 이른다", "혼자서 1만의 병사에 필적한다"고 평가했고, 곽가도 장비와 관우는 모두 1만의 병사에 필적하며 유비를 위해 죽음으로써 일하고 있다고[69] 했으며, 동소는 관우, 장비는 유비의 날개와 같아 두려워해야 한다고[70], 유엽에게도 "관우와 장비의 무용은 삼군의 으뜸이다"라고 평을 받았으며,[71] 손권 군의 중신인 주유로부터도 "장비와 관우를 거느린다면 큰 사업도 이룰 수 있다"고 평가받는 등[72] 그 무용은 천하에 널리 평가받았다.
다만 장비는 사대부에게는 존경을 표했지만, 신분이 낮은 자나 병졸 등에게는 폭력적이었다. 유비는 장비에게 지나치게 많은 사형을 내리고 항상 병사를 채찍질하며 그 당사자를 곁에 두는 것에 대해 항상 주의를 주었으나, 장비는 이를 고치지 못했고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진순신은 관우와 장비 모두 낮은 신분에서 사대부로 출세했지만, 관우는 같은 신분이 된 사대부에게 오만했고, 장비는 사대부로 출세한 것을 기뻐하며 같은 신분의 자에게는 존경을 표했지만 아랫사람에게 오만해지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고 해석했다.
당의 사관은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을 선정했으며, 관우와 장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무묘육십사장).
3. 1. 당대의 평가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장비를 관우와 함께 만인지적(萬人之敵), 즉 혼자서 많은 적과 대항할 만한 지혜와 용기를 갖춘 호걸이라 칭송하였다. 주요 평가는 다음과 같다.[90]인물 | 평가 내용 |
---|---|
진수 |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이라 불린 당대의 호랑이 같은 신하였다. ... 장비는 엄안을 풀어줬으니 국사(國士), 즉 나라의 뛰어난 선비였다. ... 다만 난폭하고 인정이 없는 단점으로 인해 몰락하고 말았다."[90] |
유비 | "충의는 소호(召虎)와 같고 명성은 사해에 떨쳤다." - 221년 황제에 오르고 장비의 품계를 높이는 책서에서[91] |
부간 | "장비와 관우는 용감하고 의가 있으면서도 만인지적이니 장수로 삼을 만한 인걸입니다." - 212년 조조 진영에서 익주 평정에 대해 논할 때 그 성공을 장담하며[91] |
정욱 | "관우와 장비는 만인적입니다." - 208년 손권이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이라 예측하며[92] |
곽가 | "장비와 관우는 만인지적이면서도 사력을 다해 유비를 위합니다." - 여포에게 무너지고 조조에게 귀순한 유비를 평하며[93] |
유엽 | "관우와 장비는 전군을 뒤덮을 정도로 용맹합니다." - 215년 한중을 정복한 조조에게 이대로 유비까지 치라고 진언하며[94] |
양희 | "관우와 장비는 호랑이 같이 웅장하고 세찼으며 세상을 바로잡는 데 헌신했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번개처럼 날며 유비를 곁에서 지켜 그의 한조 부흥을 도왔다. 그렇지만 사람을 무례하게 대했다."[95] |
주유 | " 관우와 장비는 곰이나 호랑이 같은 장수입니다." - 남군 전투 후 주유가 유비를 경계하며[96] |
배잠 | 장비가 지방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서화에 능하고 병법에 능하여 문과 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
진수는 《삼국지》에서 장비에 대해 "만 명의 적과 싸울 수 있는 맹장(萬人敵)으로 칭송받았다"고 평했다.[45] 또한, 장비가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비열한 성품의 사람을 혐오했다고 썼다. 유비는 장비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처벌을 내리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부하들을 채찍질하는 행동이 결국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장비는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49]
호주의 중국학자 라프 드 크레스피니는 장비가 전투 중에 시를 짓는 문학적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거만하고, 충동적이며, 잔혹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고 평했다.
진순신은 관우와 장비 모두 낮은 신분에서 사대부로 출세했지만, 관우는 사대부에게 오만했고, 장비는 아랫사람에게 오만해지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고 해석했다.
당나라 때 선정된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관우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무묘육십사장).
3. 2. 후대의 평가
이후로도 용맹한 장수나 훌륭한 장수를 이를 때 "관우와 장비 같다"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이후 중국에서는 관우와 장비를 용맹한 장수의 아이콘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관우와 장비의 용맹과 장수로서의 능력이 당시는 물론 후세까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22]
진수는 《삼국지》에서 장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관우와 장비는 만 명의 적과 싸울 수 있는 맹장(萬人敵)으로 칭송받았다. 그들은 (유비의) 신하들 중 호랑이와 같았다. 관우와 장비는 모두 '국사(國士)'의 풍모를 지녔다. 관우는 조조의 은혜에 보답했고, 장비는 의로움으로 엄안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관우는 굽힐 줄 몰랐고 자만했으며, 장비는 잔혹하고 냉혹했다. 이러한 단점들이 그들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것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45]
조조의 참모인 정욱은 일찍이 관우와 장비가 "만 명의 적과 싸울 수 있다" (萬人敵)고 언급했다. 이 평가는 곽가와 주유의 평가이기도 하며,[46][47] 조조의 휘하에 있던 덜 알려진 관리인 부간(傅幹)의 평가이기도 하다.[48]
진수는 장비의 전기 본문에서 장비가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비열한 성품의 사람을 혐오했다고 썼다. 유비는 장비에게 야만적인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했는데, 그는 장비에게 "너는 지나치게 과도한 처벌을 내리고 있다. 너는 종종 부하들을 채찍질하는데, 그들은 실제로 너의 명령을 수행할 사람들이다. 너의 행동은 너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비는 여전히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49]
호주의 중국학자 라프 드 크레스피니는 장비에 대해 "전투 중에 시를 짓는 문학적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는 일화가 있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거만하고, 충동적이며, 잔혹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평했다.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직후 조칙에서는 장비를 고대의 소호에 비유하여 그 무용을 칭찬했다. 정욱 등은 "장비의 용맹함은 관우에 이른다", "혼자서 1만의 병사에 필적한다"고 평가했고, 곽가도 장비와 관우는 모두 1만의 병사에 필적하며 유비를 위해 죽음으로써 일하고 있다고[69] 했으며, 동소는 관우, 장비는 유비의 날개와 같아 두려워해야 한다고[70], 유엽에게도 "관우와 장비의 무용은 삼군의 으뜸이다"라고 평을 받았으며[71], 손권 군의 중신인 주유로부터도 "장비와 관우를 거느린다면 큰 사업도 이룰 수 있다"고 평가받는 등[72] 그 무용은 천하에 널리 평가받았다.
다만 장비는 사대부라고 불리는 지식인층에게는 존경을 표했지만, 신분이 낮은 자나 병졸 등에게는 폭력적이었다. 유비는 장비에게 지나치게 많은 사형을 내리고 항상 병사를 채찍질하며 그 당사자를 곁에 두는 것에 대해 항상 주의를 주었으나, 장비는 이를 고치지 못했고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촉지 「관장마황조전」의 장비전 마지막에 장비와 관우의 인물평을 함께 싣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진순신은 이를 관우와 장비 모두 낮은 신분에서 사대부로 출세했지만, 관우의 경우는 같은 신분이 된 사대부에 대한 오만한 행동을, 장비의 경우는 사대부로 출세한 것을 기뻐하며 같은 신분의 자에게는 존경을 표했지만 아랫사람에 대해 오만해지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당의 사관은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을 선정했으며, 관우와 장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무묘육십사장).
4. 삼국지연의에서의 장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는 술과 고기를 파는 상인이었으며, 성격이 과격하고 거칠지만 술을 좋아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의 주무기는 장팔사모이다. 유비, 관우와 도원결의를 맺은 후, 평생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황건적의 장수 등무와 고승을 베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십상시와 동탁의 전횡에 분노한다. 부패한 독우(督郵)를 직접 구타하기도 한다. 호뢰관 전투에서는 유비, 관우와 함께 여포와 일기토를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유비가 서주목이 된 후, 의탁해 온 여포와 다툼을 벌인다. 유비가 원술 토벌을 위해 우이(盱眙)로 떠나면서 장비에게 술을 마시지 않고 군사들을 때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서주 방어를 맡긴다. 그러나 장비는 만취한 상태에서 조표에게 술을 강요하며 구타한다. 조표는 여포를 불러들이고,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패주한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여포와 화해하고 소패에 웅거하지만, 장비가 여포의 군마를 탈취하는 바람에 공격당하고 조조에게로 도망간다.
유비가 다시 원술을 토벌할 때 장비는 기령을 벤다.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자 유대 등이 선봉으로 오지만, 장비는 싸움을 걸지 않는다. 대신 일부러 술에 취한 척하며 부하를 구타하고, 그 부하가 유대에게 장비의 야습이 있을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린다. 그리고는 다른 쪽에서 기습하여 유대를 생포한다. 그러나 조조의 본대에 패배하여 관우, 장비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장비는 망탕산에서 무사히 탈출해 고성현령을 쫓아내고 그곳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눌러앉았다. 이 무렵 장비는 나무를 하러 간 어떤 아낙을 강제로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이 여자가 하후패의 여동생인 하후씨이다. 얼마 후 조조 밑을 떠난 관우가 찾아오자, 장비는 배신자라며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관우는 자신을 추격해 온 채양(蔡陽)을 베어 장비를 겨우 납득시켰다.
그 후 형주의 유표 밑에 몸을 의지할 때,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만나게 되는데,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는 것에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해 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는데, 조조는 이를 추격해 당양의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장판교에서 장비는 다리 위에 홀로 우뚝 서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이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 하고 호령했다. 이 호통소리에 말이 놀라 하후패 혹은 하후걸(夏侯傑)이라는 가공의 장수가 낙마한다. 장비는 강 근처 숲에 말 20마리를 묶어놓은 후 말의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먼지가 많이 일어나게 하여 복병이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조조가 두려워했던 것은 장비 개인이 아니라 장비가 숨겨놓았다고 추측되는 복병들이었다. 때문에 조조는 장비가 장판교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비는 복병을 숨겨놓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유비를 추격하게 된다. 이는 경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판교의 금강역사’라는 유명한 장면이다.
방통이 뇌양현령에 임명되고 매일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장비가 순시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복한다. 유비가 장로(張魯) 토벌을 위해 익주로 들어갔을 때, 손권(孫權)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선(劉禪)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때 장비가 조운(趙雲)과 함께 유선을 다시 데려왔다. 유장을 구원하러 장로가 파견한 마초와 필마단기로 싸우는데 3일 밤낮을 겨루었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고, 마초의 거짓 퇴각을 눈치채고 거짓 퇴각으로 맞받아쳤다.
파서에서 장합과 대치했을 때, 장비가 또다시 술에 빠지게 되자 유비가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것을 책략으로 간파하고 진중 위문품으로 맛 좋은 술을 보냈다. 장비는 변함없이 술을 마시고, 기다리다 지쳐 오금이 저린 장합이 야습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 아무도 없었으며, 이 틈에 장비는 장합의 세 성채를 탈취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의 외모는 키가 8척(약 184cm)이며, 표범 머리에 둥근 눈(豹頭環眼)을 가졌고, 제비 턱과 호랑이 수염(燕頷虎鬚)을 가졌으며, 천둥과 같은 목소리와 질주하는 말과 같은 기세(聲若巨雷 勢如奔馬)를 지녔다고 묘사된다. 장비의 자는 益德가 아닌 翼德로 표기되었지만, 두 이름 모두 만다린 발음은 동일하다. 장비는 또한 술고래로 묘사되었으며, 술에 대한 집착은 때때로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소설 전체에서 장비는 매우 충성스럽고 강력한 무사로 묘사되었지만, 또한 성급한 성격으로 종종 전장에 있지 않을 때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의 무기는 "1.8 장 길이의 정련된 강철 창"(丈八點鋼矛|장바뎬강마오중국어)이었으며, "1.8 장 길이의 뱀 창"(丈八蛇矛|장바서마오중국어), 즉 "1.8 장 길이의 뱀과 같은 창" 또는 나중에는 "뱀 머리를 가진 1.8 장 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음은 장비를 소재로 한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들이다.
- 도원결의
- 장비가 감찰관을 때려눕히다
- 호로관 전투
- 장판 전투
- 가맹관 전투
명나라 때, 바멍산 (쓰촨성 취현)의 석벽에서 바위에 새겨진 예서의 문장이 발견되었다. "漢将軍飛率精卒萬人大破賊首張郃於八濛立馬勒銘"(한(漢)나라 장군 장비가 정예 병사 만 명을 이끌고 바멍산에서 적장 장합을 대파하고, 여기에 군공을 새기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장비립마명'이라 부르며, 장비에게 우아한 면모가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현재는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워졌지만, 청나라 광서 연간의 탁본이 있어 그 필적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명문에 대한 가장 빠른 언급은 명나라 문인 양신 (촉 출신)이다. 이는 적어도 삼국 시대 이후 1200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옛부터 서도에 관한 『사체서세서』, 『서물』, 『문자지』, 『서단』, 『서서부』, 『법서요록』, 역대명화기, 『묵서』, 선화서보, 서사회요 등 저작에서는 한 번도 장비의 이름이 언급된 적이 없다. 최근, 양신에 의해 위조된 사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명대(明代)에 성립된 『소부(笑府)』에도 주창(周倉)과 마찬가지로 등장하는 등, 다른 삼국 시대의 인물에 비해 서민들에게 더 사랑받는 존재로 전승되어 왔다. 장비가 독우(督郵)를 채찍질하는 장면과 장판교에서 조조군 앞에 부동으로 서 있는 장면은 경극 등에서 특히 인기가 높아, 관객들에게 환호를 받는다. 이후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한 각종 창작물에서는 이러한 코믹함도 더해진 호걸로 활약하고 있다.
『삼국지평화』상권(『제지치신간전상평화삼국지 권지상』)에는 "[74]"라고 묘사되어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정보본 『삼국지전』·모본 『삼국연의』에서 자는 '''익덕'''(翼德),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에서 자는 '''익덕'''(益德)이다. 오호대장군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키는 8척(약 184cm), 표범 같은 우락부락한 머리에 부릅뜬 눈, 툭 튀어나온 턱에는 호랑이 수염, 목소리는 우레 같고, 기세는 사나운 말과 같다("")[75]고 묘사되는 용모에, 1장 8척의 강철 창 '사모'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무용을 자랑하는 무장으로 그려진다. 또한, 집안은 백정으로 설정되어 있다.
장비는 일기토의 명수이며, 여포와 세 번이나 싸웠고, 관우와 일기토에서 호각으로 싸운 기령을 물리쳤으며, 조조군 굴지의 무용을 가진 맹장인 허저에게 일기토에서 승리했다. 관우는 조조에게 "저의 아우, 장익덕의 무용은 저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했고, 여포 역시 술에 취해 힘을 쓰지 못하는 장비에 대해, 그럼에도 그의 강인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연의』에서 장비는 유비를 고결한 군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 조폭적인 역할을 떠맡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황건적의 난 이후 유비가 조사하러 온 군의 독우(감찰관)에게 면회를 거절당하고 매질을 한 적이 있는데, 『연의』에서는 성인 군자인 유비의 이미지를 망치지 않기 위해,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한 독우에게 화가 난 장비가 폭행을 가한 것으로 묘사된다.
젊은 시절에는, 전장에서는 맹렬한 용맹을 떨치지만, 전쟁 후의 연회에서는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결정적으로, 유비가 조정의 명에 따라 원술에게 군세를 파견했을 때, 그를 대신하여 하비를 지키고 있던 중 일어난 사건으로, 술에 취한 틈을 타, 여포와 그의 군사인 진궁의 계략에 빠져 부하들에게 반란을 당하고, 주군인 유비의 처자를 성과 함께 빼앗겨, 조조에게 몸 하나로 의탁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와 반대로 유비 일행처럼 어린이나 노인처럼 힘이 없는 민중에게는 상냥하게 대하는 등, 눈물도 많고 의리도 두터운 인물로 묘사된다.
여포 멸망 후, 유비가 조조와 사이가 나빠지자, 서주를 공격해 온 조조 휘하의 유대와 싸우기 전에, 장비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술자리를 벌이지만, 도중에 장비가 난동을 부려 부하를 폭행하는 계략을 실행한다. 이 일로 부하가 유대에게 도망쳐 장비군의 내정을 폭로하게 된다. 그 정보를 믿고 쳐들어온 유대군을 공격하여, 유대를 사로잡는다.
관도 전투 전에는 산적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유비에게 돌아오려고 합류를 바라는 관우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공격하는 등, 혈기가 넘치고, 경솔한 면모도 보인다.
유비가 제갈량을 맞이했을 때, 유비가 자신과 그를 "물과 물고기 같은 관계"(수어지교)라고 비유한 것에 질투심을 느끼고, 후에 제갈량이 지휘를 맡게 되었을 때, 관우와 함께 반발했다. 그러나 박망파 전투에서 제갈량의 작전이 적중하자 관장 등은 그 귀신 같은 계략에 감복하여, 이후 신뢰를 보낸다. 방통이 현령의 직무를 태만히 했을 때도, 이에 격분하여 죽이려 하지만, 훌륭한 솜씨를 보이자 감탄하고, 무례를 즉시 사과한다.
익주에 들어간 후에는 장합을 상대로 지략을 펼쳐 승리를 거두는 장비의 성장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의형제인 관우를 잃은 것으로 인해 부하들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지고, 그 결과 파멸한다는 비극적인 최후를 그린 부분에서, 『연의』는 "장비"라는 인물을 마무리 짓는다. 이 때 55세로 기록되어 167년에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편 전상 설창 족 화관색 출신전 전집』(화관색전)에 따르면, 청구 도원동의 자아묘에서 도원결의를 할 때, 관우와 장비는 훗날을 위해 서로의 가족을 죽이려 하는데, 장비는 관평을 데리고, 호금정(관우의 부인, 관색의 어머니)을 죽이지 않고 도망하게 한다.[76]
5.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인 | 하후씨 | 하후연의 조카딸. 200년경 장비에게 납치되어 결혼. |
장남 | 장포 | 요절 |
손자 | 장준 | 장포의 아들. 상서. 263년 위나라의 촉 정복 당시 제갈첨을 따라 등애의 면죽 방어전에 참여했으나 전사. |
차남 | 장소 | 아버지의 작위를 상속. 촉에서 시중과 상서복야 역임. 263년 유선의 명으로 등애에게 항복. 촉 멸망 후 낙양으로 가서 제후로 봉해짐. |
장녀 | 경애황후 | 유선의 황후 |
차녀 | 장황후 | 유선의 황후 |
6. 기타
장비는 때때로 중국 사찰과 도교 사찰에서 관우와 함께 문신으로 등장한다.[50] 곤극 무대에서 장비는 ''화련''으로 등장하며, 특히 ''흔동로(搖蘆)''라는 장면에서 주유를 매복하여 굴욕을 준 후 풀어주는 장면이 유명하다.
국민혁명군의 장군 장발규는 "장비"라는 별명을 얻었다.[50] 1959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원수였던 팽덕회는 자신을 장비에 비유했는데, 마오쩌둥이 조조와 자주 연관되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다른 구성원들은 이를 대립적인 것으로 해석했고, 결국 마오는 팽덕회의 경력을 끝냈다.[51]
영화 및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장비를 연기한 주목할 만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작품명 | 배우 |
---|---|
삼국지 (1994) | 이정비 |
삼국: 거룡의 부활 (2008) | 진지휘 |
적벽대전 (2008–09) | 장금성 |
삼국 (2010) | 강개 |
진·삼국무쌍 (2019) | 장진헌 |
장비는 코에이의 ''진·삼국무쌍'' 비디오 게임 시리즈와 ''무쌍 오로치'' (''진·삼국무쌍''과 ''전국무쌍''의 크로스오버)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또한 ''삼국지'', ''진 삼국무쌍 택틱스'', ''결전 II'' 등 코에이의 다른 비디오 게임에도 등장한다. 코에이 외 제작 게임으로는 ''Heroes Evolved'', ''Clash of Kingdoms'', ''삼국지: 드래곤의 운명'', ''천지창조'', ''연희무쌍'' 등이 있다.
논픽션 여행 에세이 '장비를 마주하며: 영웅인가 악당인가 인간인가'는 The Bangalore Review (2020년 4월)에 실렸다. 이 이야기는 장비가 통치하고 죽음을 맞이한 고대 도시 쓰촨성 랑중에서 호주 작가 딘 케리슨의 행적을 따라가며, 현대 중국 문화, 장비와 삼국 시대, 그리고 영웅주의의 주제를 다룬다.[52]
수집용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에는 ''포털 삼국지'' 세트에 "장비, 맹장"이라는 카드가 있다. 포켓몬스터의 염무는 장비를 모델로 했다.[53]
명대에 성립된 『소부(笑府)』에는 주창(周倉)과 함께 등장하는 등, 다른 삼국 시대 인물에 비해 서민들에게 더 사랑받는 존재로 전승되어 왔다. 장비가 독우(督郵)를 채찍질하는 장면과 장판교에서 조조군 앞에 부동으로 서 있는 장면은 경극 등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
『귀전쇄기』(양장거, 청) 「관서고사」에는 육부상이었던 장비(張飛)가 고기를 식히기 위한 무게추 돌을 관우가 들어올린 일화가 있는 「장비 우물[77]」등의 도원결의 전설이 기술되어 있다.[78]
명나라 말기의 웃음 모음집인 『소부』에는 양귀비와 장비가 등장하는 웃음거리가 있다. 어떤 남자가 해골을 공양하고 양귀비와 하룻밤을 보낸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한 옆집 남자가 똑같이 해골을 공양하자 장비가 나타나 하룻밤을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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